Q. 얘들아 혹시 오늘 규님 스케쥴 없나?
ㄴ 익명1: 웅 없으실걸 왜?
ㄴ 글쓴이: 아니… 게임 카페에서 본 것 같아서
ㄴ 익명2: 아 ㅋㅋ 오늘 데이트 가셨을걸 나도 봄 옆에 지효 언니 계시지 않았어?
ㄴ 글쓴이: 지효 언니? 그 검은 셔츠 언니가 지효 언니야?
ㄴ 익명1: ㅇㅇ 잘생겼지 둘이 데이트 하니까 멀리서만 바라봐줘 ㅋㅋ
ㄴ 글쓴이: 헐… 알겠어 난 또 둘이 드라마 찍는 줄
ㄴ 글쓴이: 아니 근데 지효 언니 사격 원래 그렇게 잘해?
ㄴ 이규혁: 네! 지효가 잘하긴 하죠
ㄴ 익명1: 공식 사랑꾼 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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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의 오전 열한 시. 사람이 바글거리는 번화가에 발을 딛어 보이자, 둘은 그제서야 휴가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와글거리는 소리들을 하나하나 귀에 담고 있으니, 쓸데없는 기대들이 둘의 마음을 콕콕 쑤시기 시작했다. 기대가 찌른 마음들의 장본인은 그저 규혁과 나온 것이 좋은 지효와, 그런 지효에게 새로운 데이트를 선물해 주고 싶은 규혁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규혁의 시선이 어디선가 멈춰섰다. 사격과 양궁을 체험할 수 있는 작은 양궁, 사격 카페였다. 벽에 덕지덕지 붙은 화려한 홍보지를 빤히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익숙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규혁의 귀를 슬슬 감싸왔다.
“가고 싶어?”
“아, 어… 응. 재미있긴 할 것 같아. 지효 너는? 어때?”
“… 네가 가고 싶으면 나도 좋아. ”
네가 가고 싶으면 나도 좋아. 지효가 내놓은 진심이 볼을 태운 홍조를 따라 규혁에게 그대로 녹아들었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마저 홍조에 맺히니, 절로 규혁의 웃음을 자아냈다. 능숙하게 지효의 부끄러움을 달랜 규혁이 눈을 빛내며 내기를 제안했다. 거한 내기도 아닌, 간단한 소원 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효는 규혁의 말에 눈을 빛냈다. 바라는 거라도 있냐는 물음에는 중대 비밀을 다루는 것마냥 끝까지 입을 열어주지 않았다. 각자의 소원을 마음에 빌고 사격 카페라고 쓰여있는 건물에 서둘러 들어갔다.
“당기실 때는 손가락에 힘 꽉 주시고요. 시작하시면 됩니다. 포기하고 싶으실 때는 두 손 올려 주시면 기계 멈춰드리겠습니다. ”
짧은 설명을 끝으로 직원이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훅 끝난 규혁의 차례를 뒤로, 지효의 차례였다. 여유로웠던 규혁의 태도와는 다르게 어딘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지효의 얼굴이 보였다. 긴장한 것을 본인도 인지했는지, 심호흡을 가볍게 한 지효가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듯이 규혁을 돌아보았다. 규혁도 그 모습에 대답하듯 주먹을 꽉 쥐어 응원하는 시늉을 지어 보이니, 금방 다시 피어오르는 웃음이 보였다. 이제 됐다는 듯 지효가 고개를 돌려 헤드셋을 쓰니, 기다렸다는 듯 큰 스피커에서 준비 멘트가 흘러나왔다. 여러 경고 사항이 끼어들어간 긴 준비 멘트를 뒤로, 작은 심호흡 소리와 함께 짧은 총성이 울렸다.
지효의 점수는 거뜬히 끝낸 규혁이 민망할 정도로 재능의 점수였다. 지효의 사격이 끝난 후, 점수를 계산하던 직원마저 놀랄 정도로. 직원은 점수를 두세 번 다시 세어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뜨문뜨문 이어가기 시작했다. 말꼬리를 흐리던 직원은 서둘러 창고로 달려가 제주도행 티켓을 둘에게 내밀었다. 일등 상품입니다. 축하드려요…. 티켓을 받자마자 동시에 지효가 고개를 꾸벅 숙여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작 대단한 성적을 낸 본인은 아무 감흥이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되려 규혁이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지효를 빤히 내려다보기 바빴을 뿐이었다.
사격 카페를 나와, 길을 걷는 내내 규혁은 쉴 새 없이 지효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지효야, 대단해. 진짜 멋있었어. 수백 개의 말풍선들이 지효의 볼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씰룩대던 입꼬리가 하늘로 솟으니, 규혁은 좋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지효가 장난스럽게 항공권 티켓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또다른 휴가를 얻게 된 기분이었다.
인생에는 별게 아닌 것이 귀엽고,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이 소중하다. 규혁에게도 그랬다. 지나가는 길 작은 오락실에 들어선 인형 뽑기에 관심을 가진 지효에게 그 인형 하나를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급히 치솟았다. 어느새 오락실 안에 들어가, 인형을 지키고 있는 유리관 안을 빤히 들여다보던 지효의 옆에 서서 규혁은 지갑을 열었다. 지폐가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걸친 인형 하나쯤은 뽑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규혁이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효도 마찬가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규혁이 조종하는 집게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기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게를 힙겹게 움직였다. 집중한 규혁을 재촉하는 타이머 소리에, 드디어 됐다는 양 조이스틱 옆 빨간 버튼을 손바닥으로 힘껏 눌렀다. 집게는 천천히 내려가, 지효가 말했던 인형의 목을 꽉 잡고 직진하다 그대로 인형을 놓아버렸다. 어… 힘없는 규혁의 탄성이 바닥을 기었다. 숨을 크게 내쉬고는 다시 지갑을 열었다. 짧은 숨에 규혁의 의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만 원을 인형 뽑기에 반납한 규혁이 유리관을 붙잡으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해도 힘 빠진 집게는 인형을 집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고, 그런 술수에 돈을 꼬박 지불하는 짓도 이 이상 한계가 있었다. 아쉽다는 듯이 유리관 안을 빤히 쳐다보니, 아래에서 위잉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시선을 아래로 옮기니, 돈을 넣고 조이스틱을 움직이는 지효가 보였다. 지효는 능숙하게 집게의 위치를 잡고, 무표정으로 버튼을 눌러 인형을 붙잡았다. 규혁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기계는 다시 한 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게를 힘겹게 움직였다. 전과 다른 점은, 집게가 더 이상 힘없이 인형을 놓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텅, 짧은 소리와 함께 작은 스피커에서 박수와 환호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효가 그 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여, 안 틈을 향해 손을 뻗으니, 폭신한 무엇이 지효의 손과 함께 딸려나왔다. 이름을 꽤나 날린 유명한 고양이 인형이었다. 지효는 인형을 규혁에 품에 안겨주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얼떨결에 인형을 얻게 된 규혁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니, 지효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앵글 속에 규혁을 담았다. 아직까지 어리둥절한 규혁의 표정을 한 번 찍으니 지효가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였다. 웃어 달라는 표시였다. 그것을 눈치채고 지효를 향해 웃어보이는 규혁의 웃음이 맑게 빛났다. 그 웃음을 앵글에 담는 지효의 얼굴도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오락실에서 나온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빛났다. 찍은 사진을 훅훅 넘겨보던 지효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니, 어디선가 손바닥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규혁의 손이었다. 지효는 익숙하다는 듯 손을 잡아 깍지를 껴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무엇이 떠오른 듯 규혁이 고개를 돌려 지효를 마주보았다. 뭐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지효에게 말을 붙이는 규혁이었다.
“지효야, 소원 뭐 쓸 거야?”
“그러게. 생각해 봤는데 역시 어렵네…. ”
“천천히 생각해도 돼. 언제 써도 괜찮아. ”
다정한 규혁의 말이 전해지자마자 고민하던 지효의 얼굴에 해답이 피어올랐다. 규혁아, 그럼 말이야……
“이게 소원이었어?”
“응, 너랑 오고 싶었거든. 너랑 오면 매일 와도 괜찮을 것 같아. ”
마이크 커버를 마이크에 씌우며 지효가 답했다. 말을 흐린 지효의 소원은 함께 노래방 가기였다. 그 말을 들은 규혁은 눈을 접어 보이며 웃었고, 지효는 쑥스러워했다. 살짝 웃은 규혁이, 노래방 리모컨을 붙잡고는 무언가를 와다닥 치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상태를 확인하던 지효가 고개를 들어 화면을 쳐다보니, 지효가 한때 규혁에게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한 노래의 제목이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지효가 제목을 읽고 살짝 웃으니, 규혁이 입을 열었다. 꼭 불러주고 싶었어. 에코로 퍼져나간 규혁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조심스레 시작한 노래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특별한 기교 없이도 특별하게 들리는 규혁의 노래 솜씨를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지효였다. 가사와 함께 녹아든 규혁의 목소리가 지효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 길지 않은 노래는 얼마 안 가 끝을 내었고, 노래방 기계에서는 박수 소리와 함께 백 점 스코어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지효는 웃으며 박수를 살살 쳤다. 새삼 노래를 정말 잘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처음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의 길이가 짧은 것을 아쉬워하게 된 지효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노래를 다 부른 규혁이 지효를 빤히 쳐다봤다. 지효는 그 시선을 못 본 체하며 고개를 훅 돌렸다. 자신에게 노래를 바라는 규혁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노래에 그리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지만, 규혁의 앞에서는 소용도 없는 행위였다. 자신의 어깨에 훅 기대는 동그란 머리통에 그제서야 못 살겠다는 듯 숨을 폭 내쉬고 고개를 돌려 노래 리스트를 쫙 살펴보기 시작했다. 툭, 툭, 선택바가 내려가는 소리가 조용한 노래방에 울려퍼졌다. 쫙 깔린 아이돌 노래가 전부 생소하게 느껴졌다. 어, 하며 짧게 내뱉은 고민의 소리를 들은 규혁이 고개를 들고 지효와 함께 노래 리스트에 시선을 돌렸다. 쭉쭉 내려가던 노래들은 규혁의 손에 툭 멈춰섰다. 지효야, 이거 어때? 같이 부를까? 가벼운 듀엣곡이었다. 한 때 둘이 차 안에서 많이 듣던 노래였다. 지효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익숙하던 전주가 방 안 가득히 흘러넘쳤다.
둘은 둘의 추억을 노래했다. 지효의 낮게 깔린 목소리는 얇은 규혁의 목소리와 잘 어우러져 노래방 부스 안을 잔잔하게 채웠다. 서서히 끝을 내는 음에 이어, 다시 한 번 규혁이 노래방 리모컨을 잡았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규혁은 지효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물음표를 띄운 지효에게 규혁이 전한 말은, 가사를 잘 봐 줬으면 좋겠어 한 마디 뿐이었다. 규혁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 집중한 지효가 살짝 웃어 보였다. 규혁의 신신당부에 띄운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규혁이 지효의 눈을 맞추니, 잔잔히 입 사이로 가사가 절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very single kiss is like a gift to me
And I love the way you decorate my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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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winter is so gray, feels like the ice is here to stay
But when you look at me, you know you melt it all away
지효는 나지막하게 가사를 따라읽다, 손을 뻗어 규혁의 볼을 감쌌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전주에 이어,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지효가 입을 열었다. 들리지 않는 사랑이었다. 짧게 입을 맞춘 지효가 맑게 웃어 보였다. 규혁아, 나는 너만 있으면…… 지효의 속삭이는 말소리에 규혁이 입을 맞추며 나른한 목소리를 내어 보였다. 너만 있으면 말이야, 끝내지 못한 말이 허공에 섞여들었다. 뒷말 대신 입을 맞추는 것으로 지효는 문장을 끝맺었다. 툭, 소리를 내며 끝난 노래와 함께.
둘의 속삭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작게 웃는 규혁의 시선을 받아치다, 밝아진 방 안 조명에 결국 빨개진 귀를 들켜버린 지효의 부끄러움이 대신 퍼졌다. 시선을 피하는 지효의 볼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어내리던 규혁이,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보고 흠칫거렸다. 규혁의 손길을 받다 고개를 돌린 지효도 마찬가지. 문 너머에 몰려든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 하며 뚝딱거리고 있는 지효의 손을 꾹 붙잡은 규혁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지효야, 뛸 수 있겠어?”
“뛸 수야 있는데…. ”
“우리 큰일났어. 얼른 도망가야 돼. ”
규혁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뒤로하고, 노래방의 문이 철컥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내는 팬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규혁은 잡은 손에 힘을 실고는 가볍게 달렸다. 지효가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내면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없어질 때까지 손을 꼭 붙잡고 달려갔다. 슬슬 지는 해가 둘의 그림자를 길게 붙잡았다. 그런 줄도 모른 채, 맑게 웃는 둘의 미소가 물웅덩이에 비쳤다.
얼마나 뛰었는지, 사람이 별로 없는 산책로가 보였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지효와, 그 옆에서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는 규혁이 있었다. 잡은 손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 호흡이 어느정도 돌아온 지효가 규혁을 보며 웃어댔다. 도망갈 거였어? 규혁은 대답 대신 지효의 손을 볼에 가져다 댔다. 지효의 손등에 따뜻한 볼이 닿았다. 못 말린다는 듯이 숨을 푹 내쉬니, 이번에는 규혁이 웃어 보였다. 말도 없이 도망 온 막무가내의 행동을 봐달라는 나름의 애교였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지효가 손등으로 규혁의 볼을 살짝 쓸어내렸다. 지는 노을마저 사랑스러운 시간이었다.
다시 번화가로 돌아가기도, 집으로 귀가하기도 애매한 시간에 걸친 둘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무작정 걸으니 마을 놀이터와 벤치 하나가 나왔다. 벤치에 앉으니, 그제서야 꺄르륵 웃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그 모습을 하나하나 빤히 쳐다보았다. 규혁이 한참을 듣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덮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째는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너 닮았으면 좋겠다. 그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규혁이 지효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을 뻔히 보내고 있었다. 지효가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다, 다시 한 번 말을 반복했다. 너 닮았으면 좋겠어. 눈도, 코도, 입도. 그렇게 닮으면 성격은 나 닮으려나. 무심하게 뱉은 말이 규혁에게는 수없이 심장이 뛰는 말로 돌아왔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 소리를 그대로 호흡에 실었다. 그럼, 그럼 둘째는 너 닮았으면 좋겠어…. 그 말은 지효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럼, 둘째 성격은 나를 닮았을까? 그 말을 들은 규혁이, 꼭 끌어안고 있던 인형을 들어 얼굴을 가린 뒤,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너라면 다 좋은데, 어떡하지?
한없이 떨던 수다를 뒤로, 이제 훅 떨어진 해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갸아만 했다. 둘은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손을 붙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긋했다. 해가 지고 온도가 떨어진 덕분에 살갗이 닿아도 불쾌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도 여전했고, 시원한 손도 여전히 서로의 손을 엮고 있었다. 규혁의 손을 타고오는 온기를 가만 느끼던 지효가 고개를 휙 돌렸다. 대답하듯 시선을 마주보는 규혁이 있었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규혁이 아닌 지효였다.
“걸어서 갈까. ”
“나는… 다 좋아. 얼마 안 걸리니까 걸어가도 되겠지. ”
“다행이네. 오늘……. ”
유독 공기가 좋아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규혁의 다정한 눈빛 때문인지, 전해져 오는 온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효는 무언가 뒷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간질거리는 마음에 입을 살짝 깨문 지효에게 조용히 속삭이는 규혁이었다. 지효 너랑 와서 더 좋은 것 같아.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귀 안을 살짝 간지럽혔다. 지효는 그 목소리가 한참 듣고 싶은 목소리라고, 저도 모르게 마음에 새기기 시작했다.
지효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발자취를 남기는 내내 들었던 목소리를 상상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목소리, 어색하게 웃을 때 새어나오는 목소리, 노래를 부를 때 살짝 간드러지는 목소리. 하나도 빠짐 없이 사랑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로 정확한 사랑을 말하고 읊어줄 때면, 정말 세상을 가진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을 정도로 요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규혁의 목소리는 밤에도, 낮에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생각이 나는 목소리였기에. 지효는 가끔 그 목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은 지난 날을 생각했다. 그러다, 우뚝 멈춰섰다. 한참 손을 잡고 걸어, 이어진 규혁까지도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되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지효가 고개를 확 들었다. 규혁의 맑고 큰 눈동자가 달빛 대신 자신을 비추는 것을 보고서야,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 좋아해. ”
입술부터 타고 내려가는 부끄러움은 지효를 새빨갛게 만들기에 적합했다. 진심을 꾹꾹 눌러담은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늦어질라 뒤따라오는 부끄러움이 얼굴을 푹 숙이게 만들었다. 어느새 놓인 손조차도 민망해지는 분위기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 지효를 빤히 쳐다보던 규혁은 예쁘게 웃으며 지효에게 다가갔다. 한걸음씩 옮겨갈 때마다 규혁은 행복이란 감정에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마침내, 둘의 사이가 틈도 없이 가까워졌을 때. 규혁은 주저없이 지효를 끌어안았다. 품에 폭 들어오는 지효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도 좋아해. ”
너는 내 인생 최초의 구원이자, 사랑이야.
외전
“지효 씨가 느끼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요?”
“사랑이요,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시네요. ”
“그런가요? 그럼, 경험담 얘기는 어떤가요? 어려워하시는 분들 대부분 그렇게도 답하시거든요. ”
지효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사랑이란? 오백 번을 고민하여도 쉽게 나오지 않는 답이었다. 어느 정도 선에서 모두 제각기 기준이 있던 다른 것들에 비하여, 사랑이라는 것만 그리 나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기준을 파괴했고, 감정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비를 맞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사랑 하나 때문에 비를 맞으며 그 사람을 보러 갔고,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사랑 하나 때문에 그 사람 대신 술을 마셨다. 사랑은 애매하다. 애매해서 어려운 것이다. 어렵고, 어려워서 자칫하면 내가 다치기 쉬운 것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존재하고, 그들의 사랑 축에는 내가 끼기 어려웠다. 사랑이란 감정 하나에 얽매이기에는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이뤄야 할 것이 많았다. 사랑은 바보 같았다.
바보 같았다. 나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김과장의 한 마디에도 그냥 웃어 넘길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나불대는 건지, 속을 마구 찔러대는 말소리에도 그 사람만 보면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마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속으로 되뇌며 자신에게 묻기 바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내가 느끼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한 번은 그 사람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막무가내인 물음이었다. 이마저도 다정한 웃음으로 대답해 주는 그 사람의 얼굴이 좋았다. 손을 꼭 잡아 오면서 입을 꾹 무는 얼굴이 보였다.
“사랑은 어려운 것 같아. ”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씁쓸해 보였다.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며 끊임없이 다짐했다. 이 사람에게 사랑이, 쉬웠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만들겠다고. 그 다짐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변화가 생겼다.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 갑자기?”
같은 질문을 몇 달 후에 던졌다. 그 사람은 질문을 곰곰이 짚어보다, 턱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슨 대답을 할까, 내가 한 것이 사랑이 맞을까. 곧이어 바닥만을 고정하던 그 사람의 시선이 얼굴로 옮겨졌다.
“너는 뭐라고 생각해. ”
천천히 걸음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창고의 분위기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 걸음은, 천천히 걸어오다가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숨결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선이 마주쳤고, 허리를 단단히 받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뭘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너는 뭐라고 생각해, 너한테 사랑이란 뭐야, 우리가 하는 게…….
생각을 온전하게 끝맺지 못한 채로 댕강 썰려나갔다. 입술이 맞닿았고, 그대로 숨결이 뒤섞였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중심을 잡기 힘들기 시작하니 생존 본능이 튀어나왔다. 옷깃을 꽉 붙잡고 눈을 감았다. 얼마 안 가 떨어진 입술에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너는 뭐라고 생각해?”
“자, 이제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네, 지효 씨가 느끼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요?”
“네, 너무 시간을 끌었네요. 저는 되물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물음을 들었을 때, 되물을 수 있는 거요. ”
“특이하네요.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저에게 사랑이란 그런 거였거든요. 특별할 것 없이요. 도망친 게 아니라 맞대었고, 회피한 게 아니라 되물었으니까요.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저에게 그건 충분한 사랑이었어요. ”
어느샌가 카메라 옆에 서 있던 규혁이 눈에 들어왔다. 둘만 아는 암호였다. 느끼는 사랑은 달랐지만, 입으로 나오는 것은 질문이었다. 카메라를 보듯이, 규혁을 쳐다보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사랑해, 이게 내 구원이자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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