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혁은 가끔 지효에게 ‘내가 없으면 지효 너는 어떨 것 같아?’라는 물음을 이따금씩 던지고는 하였다. 그럴 때마다 지효는, 규혁과 마주보면서 ‘네가 없을 일이 없으니까, 괜찮아.’ 하고 답하고는 했다. 규혁은 그 대답을 듣고서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까지, 똑같은 레파토리였다. 온기가, 믿음이 필요한 규혁에게 지효는 언제나 같은 대답으로 온기와 믿음, 안정을 돌려주고는 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사랑을 느끼고, 온기를 느끼는 그 모든 순간들. 지효도 규혁과 마찬가지로 이런 순간들에서 사랑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규혁도 마찬가지. 그 하루만 빼고.
유독 어두워 보이는 얼굴빛이 평소와 같이 내가 없으면, 하고 운을 떼는 입술에 가득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더더욱 그늘진 얼굴이었다. 오늘의 지효는, 괜찮다는 대답 대신 시선을 창가 쪽으로 옮기는 선택지를 택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규혁의 외로움과, 그늘진 얼굴에 대한 이유를 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충분히, 규혁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날씨였다. 눈을 두어번 느리게 깜빡인 지효가, 소파 끝에 걸쳐 앉은 규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규혁이 그곳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효가 규혁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 천천히, 시선의 끝을 다시 정의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본인의 얼굴이었으면, 하고 생각한 지효였음에. 지효의 손가락 끝에, 차갑고도 따뜻한 온기가 닿아왔다. 그와 동시에, 비가 오는 소리를 타고 귀에 들어오는 낮은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 미안해, 지효야.”
“……… 규혁아, 괜찮아.”
수림愁霖. 지효는 이따금 우울에 허덕이는 규혁의 상태를 수림으로 정의하곤 하였다. 지나가는 장마이지만, 우울하고 긴. 그 축축한 것이 꼭 규혁의 상태인 것만 같아서. 그래, 규혁은 가끔 수림의 상태에 빠지곤 하였다. 그런 날은 줄곧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때마다 지효는 함께 비를 맞아주었다. 허울 좋은 말로 규혁을 달래려 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들려오면 괜찮다는 말로 규혁의 비를 함께 맞아주었고, 눈물을 보이는 날에는 품을 빌려주는 것으로 비를 함께 맞아주었다. 어떠한 비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것이 우박이라도. 비가 와서 집안을 다 적시고 마르는 동안, 둘은 함께일 것이니까. 그래서 지효는, 규혁의 사과에 동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 그런 행동들로 지효는 규혁을 위로하려 들었다. 규혁이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오는 비를 그대로 맞아주었다. 그치만, 언제까지나 비를 함께 맞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효는 규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시작하였다.
규혁은 강하고도 약한 사람이었다. 지효를 만나, 사랑이란 장벽을 차차 쌓아간 앞모습이 있기도 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뒷모습도 있었다. 지효의 느리고 깊은 사랑을 천천히 받아내고 있던 규혁은 지나가는 비에게 붙잡혀, 뒷모습과 굳지 않은 앞모습 모두 하염없이 공격 당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차오르는 물살에 휩쓸려간 장벽 잔해를 겨우겨우 붙잡고 미안하다고 울어대는 규혁이 그곳에 있었다. 그때, 지효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지효는 늘 절망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규혁의 내면에서 오는 비까지도 함께 맞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효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규혁의 목을 감싸고 있는 괴로움의 원천들을 없애고 싶었다. 지나가던 규혁을 붙잡은 비, 내면에서 오는 비를 그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효는, 괜찮아 대신 그래도 돼, 라는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나긴 장마가 하늘을 훑고 있다. 지효가 이제는 익숙해진 빗소리를 들으며 규혁의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은 얼마 안 가, 도어락 소리에 끝맺어졌다. 고개를 확 든 지효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비를 잔뜩 맞고 들어온 규혁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규혁을 맞은 지효는, 몇 초간 고개를 푹 숙인 현관의 규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축축히 젖은 머리를 보고 있자니, 마치 어린 아이가 비를 훌쩍 맞고 들어와 잔뜩 서러움을 표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단아한 얼굴과 머리칼에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지효의 속에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들이 훅 밀려왔다.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축처진 규혁을 눈에 담던 것도 잠시, 지효는 고민도 하지 않고 성큼 발을 내딛어 규혁의 앞으로 다가갔다. 분명 나보다 몇 센티는 더 큰데, 왜 이렇게 어린 아이 같지. 어설픈 동정이 아니었다. 마음에서 끌어오르는,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동정이라기에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규혁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안쓰러웠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고개를 서서히 들어 본인과 눈을 맞춰오는 규혁의 시선이 축축했다. 맞닿은 시선이 민망해질 때쯤, 지효는 규혁을 끌어안았다. 지효는 규혁의 물기가 자신의 몸에 스며드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돼, 라는 우산을 함께 쓰고 싶었기 때문에. 그저 같이 맞아주는 것이 아닌, 함께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효는 스며드는 것을 택하였다. 규혁에게 진정한 괜찮음과, 안정적인 안식처, 사랑을 가득 안겨주고 싶었다. 규혁의 차가운 손이 따뜻한 지효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남이 보기에는 규혁이 지효를 위로해 주고 있는 꼴이었지만, 위로의 주체는 규혁이었다. 규혁은 분명, 지효의 품에서 울고 있었다. 혼자 맞는 물기가 너무나도 서러웠던 지난 날의 기억들이, 지효의 품 하나에 사르르 녹아가는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어대고 있었다. 지효는 감정을 꾹꾹 눌러담는 그 서러운 눈물에 다시 한 번 규혁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이제는 네가 수림이어도 괜찮을 것 같아. 한껏 물기를 머금은 지효가 그렇게 생각하며 옅게 웃음 짓고 있는 규혁의 머리를 수건으로 정성스레 털어주고 있었다. 지효의 손길을 느끼던 규혁이 콧노래를 중얼거렸다. 이제 좀 괜찮아? 지효가 물으니 규혁이 웃는다. 응, 괜찮아. 내가 한 건 별로 없는데도, 정말 괜찮아? 네가 한 게 없기는. 나 기다려 줬잖아. 마중도 나와줬고, 손도 내밀어 주고, 안아도 줬어. 지효야,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도 너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지효가 열심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곤 규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런 지효를 빤히 쳐다보던 규혁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혼자 비를 맞고 집에 들어오면 항상 나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고, 모든 것을 치우고, 혼자 따뜻한 물을 데워먹어야만 했었어. 어머니는 누워 계시고, 선생님은 바쁘셨어. 그런데 비를 맞고 들어왔는데, 이제는 지효 네가 기다리고 있어서… 나는 정말… 정말로, 기뻤어.“
규혁의 목소리가 물기를 가득 실었다. 가만 듣던 지효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다시 푹 숙인 규혁의 입가는 기쁨에 못 이긴 애틋한 감정이 퍼져가고 있었다. 살살, 규혁의 머리칼에 내려앉은 물기들이 모두 털어지니 곧이어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지효의 눈길을 끌었다. 비가 멈췄고, 물기가 사라졌다. 울음이 멈추고, 슬픔이 사라졌다. 햇빛을 빤히 쳐다보던 지효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비가 오는 날은 따뜻한 물을 끓여두는 버릇을 들여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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